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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되는 정보/about 과학

과학의 패러다임

 

 

현대인에게 진리의 가장 유력한 후보는 누가 뭐라 해도 과학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라는 말이 붙거나 "외국 대학의 어느 연구소에서 실험한 결과"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특별한 망설임 없이 이를 사실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생각해보니 저 또한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1초에 망설임도 없이 수긍해왔습니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사실 여부를 검증하기 어려운 현대인에게 그나마 과학자 집단이 연구한 사실을 신뢰하는 것은 매우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과학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태도를 '과학주의'라고 합니다. 과학주의는 모든 문제가 과학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인데, 흥미로운 사실은 실제로 과학자 집단이 과학에 대해 갖는 신뢰보다는 대중이 과학에 대해 갖는 신뢰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실제 내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과학이 진리라고 믿는 마음가짐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매우 종교적인 것 같습니다.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

우리의 과학적 믿음에 찬물을 끼얹고, 과학적 진보라는 것이 허구이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서 과학이 발전해온 것이 아님을 밝힌 인물이 토마스 쿤이라는 과학 철학자입니다. 

20세기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과학철학자 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워낙 유명해서 일상에서도 종종 들을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사고의 틀' 정도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장님이 직원들을 앞에 두고 "이제 우리 회사도 패러다임을 바꿀 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이 말은 사고를 전환하고, 발전해 가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러한 용어 사용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사실 쿤이 원래 사용한 의미대로 생각해보면 사장님의 말은 매우 이상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사고의 틀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이러한 사고의 틀이 형성되기까지의 비합리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의 과정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의미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단지 예전과는 달라진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쿤이 왜 이런 개념을 제시하게 되었는지, 과학혁명에서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과학의 패러다임

과학철학자 쿤에 의하면 대중의 기대와는 달리 과학의 발전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과학의 역사가 실험과 관찰 그리고 수학 적용에 따른 논리적 진보일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쿤이 과학사를 면밀히 살펴본 결과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제 과학에서의 패러다임 변화는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1단계 : 우선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신뢰하는 시기라고 해보자. 이 단계에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모두에게 무척 당연한 사실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굳이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천동설은 이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 이때의 천문학자들은 이 패러다임 안에서 실험과 관찰을 진행한다. 밤하늘을 관측하고 행성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 것이다. 패러다임 안에서의 과학 활동을 '정상 과학'이라고 부른다. 정상과학이 진행될수록 패러다임은 점점 더 확고해진다.

2단계 : 그런데 위기가 찾아온다. 정상과학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변칙 사례가 발견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밤하늘에서 화서의 결오를 추적하다 보면 원래의 경로와 다르게 역행해서 움직일 때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천동설 안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러한 변칙 사례들이 발견된다고 해도 패러다임이 단번에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패러다임보다는 변칙 사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변칙을 수용하려는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도 실제로 주전원이라는 새로운 규칙을 추가해서 화성의 역행을 설명하고 천동설의 변칙 사례를 해결했다.

3단계 : 위기가 심화되고 혁명이 발생하는 시기다. 새로운 변칙 사례들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기존의 정상과학이 이를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면, 패러다임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온다.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젊은 과학자 집단이 새로운 이론으로 기존 이론에 도전한다. 이 시기에는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이 경쟁하게 되는데, 이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듯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다듬어지지 않은 까닭에 기존의 패러다임보다는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미적으로 보기에 좋다거나 더 간결해진다는 과학 외적인 요인들을 기반으로 젊은 과학자 집단에 의해 주장되는 단계다. 과학계를 장악하고 있던 나이 많은 과학자 집단은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변칙들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하고 노련한 방법들을 사용한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지만, 기존 과학계로부터 다양한 비판을 받은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움직이는 지구에서 왜 사람이 쓰러지지 않는지 등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어서 당대에는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4단계 :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것을 폐기하고 혁명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정상과학이 되는 단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변화가 기존의 정상 과학과는 단절되는 혁명적인 변화라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는 새로 등장한 과학 이론이 기존의 과학 이론들을 아우르면서 점진적으로 과학의 진보를 이루어낼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쿤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과학은 기존의 정상과학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상과학으로 이전해가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이를 '과학혁명'이라고 한다. 쿤이 '과학발전' 대신 '과학혁명'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과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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