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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역사 (고대과학-중세과학-근대과학)

 

고대 과학  

고대 과학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과학이라 말하기 어렵다. 이 시기의 과학은 관찰과 실험이라는 과학의 고유한 방법론을 사용하기보다는 사유 실험이나 추상화 과정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철학과 유사한 면모를 보였고, 이 둘이 실제로 구분되지도 않았다. 자연 철학자들은 주로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무엇인지에 대해 논의 했다. 이런 기본 요소를 아르케(arche)라고 하는데, 물, 불, 원자 등이 아르케의 후보들이었다. 이 시대에 과학과 관련된 중요한 인물로는 탈레스,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등이 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는 2세기 중엽에 활동한 인물로, 천문학에서 놀라운 성과들을 이루었다. 그는 당시의 천문학 지식들을 모은 저서<알마게스트>에서 천동설을 주장했고, 이에 대한 근거를 수학적으로 기술했다. 천동설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의 천체들이 회전한다는 설명으로, 매우 상식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천동설에 따르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고정되어 있다. 가장 가깝게 달이 회전하고 그 바깥으로 수성, 금성, 태양이 차례로 회전한다.

천동설은 지구가 정지해 있다는 상식에 부합했고, 수학적으로 예측 되었으며, 신이 창조한 인간 세계를 세계의 중심에 놓았다는 점에서 이후 1400년간 유럽인에게 거부감 없이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중세 과학 

중세 천 년이 지적 역사에서 암흑기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과학에서는 암흑기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수용한 스콜라철학에 의해 현실 세계와 경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명맥을 이어갔다. 

특히 스콜라철학 시기에 활동했던 신학자 오컴은 '오컴의 면도날'이 라고 부르는 원칙을 제시했는데, 이는 앞으로 탄생하게 될 근대 과학을 위한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컴의 면도날이란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서로 다른 두 이론이 존재할 때, 논리적으로 더 간결한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진실에 가깝다는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어 돌에 걸려 넘어진 사건이 발생했다고 해보자. 이 현상에 대한 이론은 두 가지다. 

A이론: 부주의했다. / B이론: 내가 어제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신이 나에게 벌을 주신 것이다.

오컴에 따르면 우리는 A이론을 선택해야 하낟. 그것은 우리가 신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와는 무관하게, 단지 A이론이 추가적인 전제 없이 더 간결하기 때문이다. 면도날의 의미는 추가적인 가정과 전제를 잘라 낸다는 것이다. 

중세 말기가 되면 믿음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오컴의 면도날처럼 객관적인 이론을 정립하고 찾아내는 방법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탐구는 결국 과학 담론이 탄생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을 제공했다. 

 

근대 과학 

중세가 저물고 르네상스가 태동하던 시기에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등장하며 비로소 과학이라 부를 만한 탐구 방법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코페르니쿠스는 15~16세기에 활동했던 폴란드의 천문학자로, 1,400년간 진리로 받아들여진 천동설을 비판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그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가 세 번째 행성으로 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가 이단 재판을 우려해서 출간을 주저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저서는 교회와 큰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가 경험적 관측 자료나 수학적 근거를 적절히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근거가 부족한 주장은 그 내용이 아무리 파격적이라 해도 사회에서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두면 천동설에서 복잡하게 설명해야 했던 행성들의 운동을 매우 단순한 원운동으로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미학적인 측면이 컸다. 

그래서 처음 공론화한 인물이 코페르니쿠스임에도 불구하고, 지동설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이는 갈릴레이다. 16~17세기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그는 경험적 관측 자료와 수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지동설을 지지했다. 그는 "우주는 수학 문자로 쓰인 책" 이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자연 과학의 원리에 수학을 적용하기 위해 힘썼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근대 과학을 출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갈릴레이가 일반적으로 '과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갈릴레이의 저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 체제에 관한 대화>가 교황청에 의해 금서가 되고, 갈릴레이가 재판에서 자신의 견해를 철회할 것을 강요 받은 것도 그의 근거가 코페르니쿠스에 비해 수학적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수학으로 설명했는지의 여부가 왜 그리도 중요한가? 수학은 예나 지금이나 인류가 찾아낸 학문 체계 중에서 가장 진리와 가깝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수학이 단지 사람들 간의 약속이므로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서는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수'와 '연산기호'의 표기 방법은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당연히 달라지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동일하게 작동한다. 수학적 표현은 사회와 문화마다 달라 질 수 있으나, '하나와 둘이 만나면 셋이 된다' 라는 내적 의미는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변하지 않는다. 

과학은 수학과 관찰의 방법을 병행함으로써 합리론과 경험론 모두를 이론에 대한 근거로 활용한다. 이러한 이중검증 절차가 과학이 그토록 빠른 시간에 진리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게 한 조건이었다. 갈릴레이가 과학의 아버지인 것은 그가 과학적 관찰과 수학적 근거를 병행해서 제시하는 방법론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추가적으로 보충한 인물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이다. 그는 스승이었던 티코 브라헤가 남긴 방대한 천문학 자료를 기반으로, 우주를 기하학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로써 갈릴레이와 케플러 이후로 행성들의 움직임은 수학으로 기술되었다. 이때 자연 세계를 기술하는 수학은 기하학이었다. 선, 면, 입체 등의 대상을 연구하는 수학 분야인 기하학을 우주에 적용한 것이다. 이제 인간에게 우주는 기하학적 세계가 되었다. 

얼마 후, 데카르트가 기하학과 대수학을 연결하는 해석기하학을 탄생시켰다. 데카르트 이전에는 수학의 두 분야인 기하학과 대수학이 따로 발전해가는 학문이었다. 그런데 데가르트가 이 둘을 연결하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그 방법은 좌표평면이었다. 즉, 동그라미, 삼각형, 직선 등 기하학의 대상을 숫자와 문자로 된 대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해석기하학의 탄생이 의미하는 것은 기하학이 된 자연 세계가 이제 문자와 숫자의 방정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류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자연 세계를 수학의 언어로 온전히 서술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