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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되는 정보/about 과학

세계 역사 속에 존재하는 과학자들

 

그리스 최초로 해시계를 만든 '아낙시만드로스'

밀레투스의 '아낙시만드로스'는 연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막대기를 수직으로 세워 해의 움직임에 따라 막대의 그림자가 이동하는 것을 관찰하여 1년의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했고 계절의 시작과 끝도 제대로 알아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상대방을 때리고 찌르는 무기로만 사용돼 온 막대기가 아낙시만드로스 덕분에 처음으로 훌륭한 시간 측정 도구로 활용된 셈입니다.

그는 그리스에서 최초로 해시계를 만든 사람이었고 당시까지 알려진 세상을 지도로 표현하고 별자리의 모양을 나타내는 천구도를 만든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훨씬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생각이었겠지만, 그는 해, 달, 별이 천구 위에서 움직이는 구멍을 통해 보이는 불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지구가 하늘에 매여 있거나 지지받지 않고, 대신 우주의 중심에 고정되어 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왜냐하면, 지구가 '천구' 위의 모든 지점에서 등거리에 있으므로 지구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범상치 않은 주장을 하나 더 살펴보겠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사람은 태어났을 때 무력하기 이를 데 없으므로 만일 인류의 첫아기들이 혼자 이 세상에 왔다면 그들은 그 즉시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려도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다른 동물들이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또 생명의 자연 발생설을 제창했습니다. 생명은 진흙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했으며, 최초의 동물들은 가시로 덮인 물고기라고 말했습니다. 이 물고기들의 후손 중 일부가 물을 버리고 뭍으로 올라오고,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변이를 통해 다른 동물로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무한히 많은 수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세계 모두에 생명이 서식하고 그들은 소멸과 재생을 반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주장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 이상으로 이 끊임없는 활동들이 신성한 분의 뜻에서 비롯됐음을 생각지 못했다."라고 슬픈 듯이 한탄을 한 것입니다. 

기원전 540년, 비합법적으로 지배자가 된 폴리 크라테스

기원전 540년경, 사모스 섬에는 폴리 크라테스라는 비합법적으로 지배자가 된 이 사람이 정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섬과 섬을 돌아다니며 식량을 조달해 주는 운송인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국제 해적이 된 인물로 추정한다고 하는데요, 폴리 크라테스는 예술, 과학, 공학에는 인색하지 않았던 후원자였지만, 자기 나라 사람들을 억압하고 주변국들과 전쟁을 일으키는 폭군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는 침략을 받을까 두려워하긴 했습니다. 그것 때문이지 자기 나라 수도 주위에 길이 6킬로미터의 거대한 성벽을 둘러 요새를 구축했습니다. 그 성벽의 유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고 합니다. 멀리 수원지로부터 요새 안으로 물을 대기 위해 거대한 터널을 파게 했는데, 그 터널은 길이가 1킬로미터나 되는 산을 관통했습니다. 산의 양쪽 끝에서 파기 시작한 두 개의 구멍이 터널 중간에서 거의 정확하게 서로 만났습니다. 터널 공사가 완성되기까지 15년이 걸렸습니다. 이 공사의 성공이야말로 당시 토목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 주는 증거인 동시에, 이오니아 인들의 놀라운 실용적인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업 성공의 이면에는 어두운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 거대한 터널은 쇠사슬에 묶인 노예들이 건설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수의 노예들은 폴리 크라테스의 해적선이 잡아온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당시는 테오도루스의 시대였습니다. 테오도루스는 그 시대 공학기술의 거장이며, 열쇠와 자물쇠, 자, 목수용 곱자, 수준기, 지렛대, 선반, 청동 주조 기술, 중앙난방법 등의 발명가로 그리스 인들 사이에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의 기념비는 찾아볼 수 없을까요? 자연의 법칙에 대해 꿈꾸고 심사숙고하던 당시의 이론가들은 공학자나 기술자와 자주 대화를 나누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론가는 대부분 기술자를 겸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 사회에서는 이론과 실제가 함께 했던 것입니다.

히포크라테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근처의 코스 섬에서는 히포크라테스가 그의 의학 전통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하나를 제외하면 그가 세운 의학의 전통에 대해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가 세운 의학의 전통은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의술이 물리학과 화학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의 전통에는 이론적인 내용도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저술한 '고대 의술에 관하여'를 보면 "사람들이 간질을 신이 내린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그 병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모두 신이 내렸다 여긴다면, 그 목록에 어디 끝이 있겠는가?"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간에 흐름에 따라 이오니아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은 실험의 기법들과 함께 그리스의 전역을 거쳐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아무도 공기의 존재를 믿지 않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사람이 호흡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신의 숨소리라고 생각했고,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적인 물질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